"익산시, 안부 살핌 우편서비스로 따뜻한 복지 실현"이라는 뉴스를 봤다.

 

우체국, 지역사회, 그리고 행정까지 손을 맞잡고 '안부 살핌 우편서비스'라는 걸 시작한다고... 고립된 이웃들을 위해 집배원들이 직접 필수품을 전달하고 안부를 확인하는, 꽤나 뭉클한 그림이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빠르게 흘러가고, 그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는 이들은 종종 뒤처지거나, 심지어 완전히 고립되기도 한다. 눈부신 성장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 같은 존재들. 익산의 시도는 바로 그 그림자 속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편 서비스라는 다소 전통적인 방식을 택한 점이 눈에 띈다. 첨단 기술이 일상 깊숙이 파고든 시대에, 손 편지나 소포처럼 아날로그적인 매개체가 오히려 더 따뜻한 온기를 전해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매달 두 번, 집배원을 통해 전해지는 작은 물품과 안부 인사가, 홀로 지내는 이들에게는 단순한 물건 이상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우리 마을행복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위촉된 집배원들의 역할은 단순히 물건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들은 어쩌면, 고독이라는 짙은 어둠 속에 갇힌 이들에게 건네는 작은 빛줄기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연결망이 희미해진 시대에, 이들의 방문은 단절된 관계를 다시 잇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식은 우리에게 씁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사회에 살게 된 걸까? 왜 당연히 누려야 할 인간적인 교류와 안전망이, 특별한 서비스의 형태로 제공되어야만 하는 걸까?

익산의 노력은 분명 의미 있다. 작지만 소중한 발걸음이다. 하지만 이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 전체의 숙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누구도 외톨이로 남겨지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고민과 노력이, 과연 충분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결국, 익산의 이 따뜻한 시도가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가, 우리 사회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러한 '특별한' 서비스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그런 사회가 오기를 조용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