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긴자 거리나 파리의 샹젤리제와는 또 다른 풍경. 지금 서울의 소비 지형도는 예리한 단층선을 그리며 갈라지고 있다.

 

한쪽에는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방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 풍경이 펼쳐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단돈 100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앱테크와 짠테크 정보를 교환하는 커뮤니티가 북적인다.

 

백화점 1층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이 각축을 벌이는 격전지가 되었고, 동시에 편의점의 자체 브랜드(PB) 상품과 초저가 생활용품점은 불황 속에서 기록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이 극명한 대비는 단순한 소비 트렌드를 넘어, 우리 사회의 허리였던 '중산층'이라는 지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과거, 합리적인 가격과 준수한 품질을 갖춘 브랜드와 상품들이 포진했던 '중간 지대'는 점점 더 텅 비어 가고 있다. 소비는 왜 양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중간은 어디로 사라지고 있는가? 매거진 B는 이 소비 지형의 단층을 따라 그 근원과 현상, 그리고 이 시대의 욕망과 불안의 민낯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THE EXTREMES: Luxury Playground vs. Value Battleground

  • 정점의 경험, 럭셔리: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드컴퍼니(Bain & Company)에 따르면, 전 세계 개인 명품 시장은 팬데믹 이후에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2023년에도 약 3620억 유로 규모로 성장했다. (근거: Bain & Company, "Luxury Goods Worldwide Market Study" 발표 자료 인용 보도)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주요 시장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로만 치부할 수 없다. 희소성, 장인정신, 헤리티지가 담긴 브랜드 스토리는 소유자에게 단순한 상품 이상의 '정체성'과 '경험'을 제공한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젊은 세대에게 럭셔리 브랜드는 자신의 취향과 성공을 드러내는 강력한 상징 자본으로 기능하며, 한정판 스니커즈나 협업 제품은 재테크 수단으로까지 여겨진다. 이들에게 고가 소비는 때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보상 심리이자, 현재의 만족을 극대화하려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적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 생존의 기술, 초저가: 반대편 극단에는 '가성비'를 넘어 '갓성비'(신을 의미하는 God과 가성비의 합성어)를 추구하는 흐름이 거세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고물가·고금리 상황이 지속되면서 실질 소득이 줄어든 가구가 늘어나고 소비 지출 증가율이 둔화되는 추세가 나타난다. (근거: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결과 발표) 이러한 상황은 소비자들을 극단적인 가격 비교와 할인 정보 탐색으로 내몬다. 다이소와 같은 균일가 생활용품점의 폭발적인 성장, 대형마트와 편의점 PB 상품의 약진은 이를 방증한다. (근거: 관련 기업 실적 발표 및 유통업계 분석 자료) 여기서 소비는 생존과 효율성의 문제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얻으려는 합리적 선택이며, 절약을 통해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려는 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냉장고 파먹기(냉파), 무지출 챌린지 등 절약 노하우가 적극적으로 공유되며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THE VANISHING POINT: The Hollowed Middle

소비의 양극단이 팽창하는 동안,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곳은 바로 '중간 시장'이다. 한때 백화점의 주력 고객층이었고, 합리적인 가격대의 브랜드들을 선호했던 중산층의 소비 여력이 위축되면서 이들을 타겟으로 했던 브랜드와 기업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의 보고서는 한국 사회의 중위소득층 비중이 점차 감소하고 소득 불평등도가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근거: KDI 등 국책연구기관의 소득분배 관련 보고서) 가계부채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에 머물러 있고, (근거: 한국은행 가계부채 통계) 실질 임금 상승률은 더디다.

 

결국,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는 중산층은 과거처럼 '적당한 수준'의 소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필수적인 소비를 제외하고는 지출을 줄이거나, 아예 초저가 시장으로 이동하거나, 혹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현재의 만족을 위해 '작은 사치(small luxury)'에 집중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소비 행태를 보인다.

 

이들이 떠난 중간 시장은 가격 경쟁력에서 초저가에 밀리고, 브랜드 가치나 경험 측면에서 럭셔리에 밀리며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특정 브랜드의 부진을 넘어, 경제의 허리가 약화되고 사회 전체의 안정성이 저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DRIVERS OF DIVERGENCE: Income, Anxiety, Values, and Screens

이러한 소비 지형의 단층은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만들어낸 결과다.

  • 소득 격차: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다. 벌어들이는 돈의 차이가 소비할 수 있는 영역 자체를 분리시킨다.
  • 거시적 불안: 팬데믹, 전쟁, 기후 변화, 고용 불안 등 예측 불가능한 미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에 집중하게 만들거나(고가 소비), 혹은 극단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게(초저가 소비) 한다.
  • 가치의 재편: 물질적 소유보다 경험과 개인의 만족을 중시하는 경향, 그리고 자신의 신념(친환경, 윤리적 소비 등)을 소비로 표현하려는 욕구가 기존의 가격 중심 소비 패턴에 변화를 가져왔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매년 발표하는 '트렌드 코리아'에서도 이러한 가치 변화를 꾸준히 지적하고 있다. (근정도서: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 디지털 스크린: 소셜 미디어는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선망과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시키고, 알고리즘은 개인의 소비 성향을 극단으로 유도하며 정보의 확증 편향을 강화한다.

REFLECTION: A Fractured Landscape

소비의 양극화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의 변화가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 변화하는 가치관이 투영된 거울과 같다. 럭셔리 브랜드 매장 앞의 긴 줄과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그 사이의 '평범함'을 상징했던 중간 지대는 텅 비어 가고 있다.

 

이러한 소비 지형의 변화는 기업에게는 새로운 전략을 요구하고, 사회적으로는 계층 간의 이질감을 심화시키며, 개인에게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불안을 느끼게 만든다.

 

이 단층선 위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균열은 우리 사회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가? 소비라는 프리즘을 통해 드러난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